지구를 정복하겠다는 외계 문어를 대뜸 라면에 넣어 버린다

입력 2024-02-14 19:00   수정 2024-02-15 00:49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정보라 ‘문어’ 中)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2023년 미국도서상 최종 후보에 연달아 오른 정보라 작가(사진)의 새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SF(과학소설) 모음집이다. 단편소설 여섯 편엔 문어를 비롯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해양생물이 주요 소재 겸 제목으로 사용됐다.

이 책은 강사법 개정 이후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이 대량 해고된 사태를 배경으로 한 ‘문어’에서 시작된다. 한밤중 대학 본관에 나타난 외계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고 엄숙하게 선포하지만,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잠결에 이 문어를 잡아서 라면에 넣어 먹는다. 다소 황당하고 엉뚱해 보이는 서사지만 작가와 남편인 임순광 전 한국비정규교수노조위원장의 실제 이야기가 녹아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초반 5~6쪽은 2021년 한 대학교 농성장에서 썼다고 한다.

농성장에서 만나 사랑을 시작한 ‘나’와 ‘위원장님’은 말을 거는 대게를 만나고, 붉은 피부의 상어와 우주 해파리 등 기이한 해양생물체들과 계속해서 얽힌다. 두 사람은 해양정보과라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연행되고 억류되기를 반복한다.

허무맹랑한 외계 생물체들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기이하고 코믹한 해양생물체와의 에피소드 이면엔 노동, 장애, 기후와 생태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사회 이슈가 담겨 있다. 부당한 현실 문제에 맞서기 위해 조직을 만들어 농성하고, 전동스쿠터를 탄 어머니와 경북 포항 죽도시장의 어르신 등 평범하고 익숙한 캐릭터와 배경이 펼쳐진다.

정 작가 특유의 날 것 그대로 재치 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물들의 코믹한 행보와 분노가 가득 담긴 ‘속사포 랩’ 같은 문장이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세계의 모순을 거울처럼 비춰낸다. 책장을 덮으면 투쟁하는 작가 정보라가 외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투쟁!”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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